
때는 6월. 내가 사는 동네에는 가까운 대형마트가 마땅치 않아요. 이곳은 널린게 대형마트이고 분명 서울이지만 시장이 많아 저녁에 장 보려면 10분 이상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이상한? 동네...
늘 그렇듯 늦게 장을 보고 버스 타고 돌아오는데, 골목 사이에서 연기가 나면서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더군요.
순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해주시던 장작불에 고구마가 생각나듯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곤 했지만 여기는 장작불을 지필 수 없는 도시 한복판. 그것도 버스 정류장이지요. 🤔
이게 무슨 냄새야 하고 의문을 가지며 집을 가던 도중 건물과 건물 사이, 무언가 활활 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이게 뭐지? 싶어 벙 쪘지만 곧 정체를 알아챘죠.
누군가 무단으로 투기한 쓰레기가 활활 타고 있는 겁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박스에 각종 자재와 쓰레기를 넣어 내놨더군요. 자취를 시작하며 이사온 이 곳은 아무래도 거주비가 저렴하다보니 이런게 일상입니다.
일단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지기가 ”어떡할거야?“ 라고 묻습니다. 뭘 어떡해요. 119 신고해야죠. 작은 불도 일단 신고해야한다는 교육을 듣고 자란 저는 일단 신고부터 하고 봅니다.
“네~ 119입니다“
“여보세요. 여기 00동 0000 정류장 00-00 인데요. 쓰레기 더미에서 불이 크게 나서요.”
“네~ 지금 출동하겠습니다.”
일단 신고부터 하고 ’뭐 불 끌게 있나... 소화기라도 있으면 좋은데 빌려야 하나?‘ 싶었는데 이전에 불 났는데 소화기 안 빌려준 업주들이 있다는 뉴스가 불현듯 생각나 바로 포기합니다.
불 앞에서 두리번 거리는데 불을 보고 사람들이 점점 모여듭니다. 그나마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은 “신고했어요?” “학생 (아님) 신고했어?” 라고 묻기라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슬쩍 보고 그냥 쌩 지나가버립니다.
’저 인간들은 이 늦은 시간에 뭐가 바쁘다고 불을 두고 그냥 가나‘ 하며 괜시리 두리번 거리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화기가 딱 보이더군요.
정류장이라 보이는 소화기가 딱 설치돼 있던 것이네요. 평소엔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급할 때 한 눈에 보여 참 다행입니다.
소화기는 학교, 군대에서 사용 교육만 받았지 실제로 써본 적은 없었는데요. 소화기를 들어보니 제법 묵직하면서 ’이걸 내가 꺼야 하나?‘와 ’소화기 처음 써보는데 잘 꺼질까?‘ 싶은 마음에 긴장도 됐습니다.
안전핀을 뽑고 레버를 불 쪽으로 잡고, 바람을 등지며 손잡이를 꽉 잡으니 분말이 강하게 뿜어져 나옵니다. 생각보다 강해서 놀랐네요. 이왕 총대를 잡았으니 내가 불 끄고 만다는 생각으로 그냥 시원하게 한 통 다 때려넣었는데 분말로 인한 분진이 좀 잠잠해지니 하얗게 타다 만 종이박스만 보입니다.
그래서 뭐가 불을 붙였을까 하고 아무 생각없이 신발로 툭툭 차봤는데, 담배꽁초가 떨어지더랍니다. 아마 꽁초들로 보면 오랜 기간 그 자리에 있었고 박스가 재떨이 겸용으로 써있던 것이겠죠. 그리고 그 옆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다 그대로 불이 붙은거구요.
정신없이 불을 끄고 나니 옆지기가 “불 다 꺼졌는데 119 안 와도 되는거 아닌가?” 라고 하여 정신이 팍 듭니다. “그럴 것 같네” 하고 답하고 다시 119에 전화를 걸었죠.
“예 119입니다.”
“예 아까 000에 불났다고 전화했었는데... 소화기 정류장에 있어서 하나 꺼내다 썼어요. 불 다 꺼져서 안 오셔도 될 것 같긴 해요.”
“아 네! 거기 이미 출동해서 가고 있어요.”
아 네... 이미 오고 있다면 어쩔 수 없죠. 정신 차리고 보니 주변에 사람이 꽤 몰렸습니다. 소화기는 아까 있던 보이는 소화기함에 넣어뒀는데 뽑은 안전핀을 다시 꽂는 법을 도통 모르겠습니다. 아마 시간이 있었으면 알아봤었겠지만 보는 눈이 많아 그냥 있던 자리 그대로 원위치합니다.
잠시 기다리니 전화가 옵니다. 아마 119를 타고 온 소방관 님께서 전화 주신 것 같네요. 도착 전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셔서 대충 사진을 찍어 보내줍니다.

쭉 지켜보니 잔불은 없는 것 같아 집에 돌아가려보니 경찰관 1대가 도착합니다. 경찰차에서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 경찰관 한 분과 젊으신 여성 경찰관 분께서 소화기를 들고 부리나케 뛰어옵니다.
저는 이미 화재 현장을 나와 군중 속에 숨어 제3자?가 된 입장. 경찰관 분께서는 ”뭐야 다 꺼졌네?“ 이러시고 제가 불 끌 동안 옆에서 뒷짐 지고 지켜보고 계시던 할아버지 (모르는 분)께서 오신 경찰관에게 “어떤 학생 (아님)이 소화기로 불 다 껐으니 물 좀 만 뿌리면 되겠어~” 라고 말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경찰관 분께서는 부리나케 옆에 있던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가 대야에 물 한 동이를 가득 채워 들고 나옵니다. 아마 ‘사장님 옆에 불 나서 물 좀 쓸게요!’ 라고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사장님은 사장님 대로 놀라셨겠군요. 제 상상입니다.)
경찰관도 왔으니 불 꺼졌겠다 하고 돌아가는데 멀리서 삐용삐용 시끄러워지더군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니 소방차 2대와 응급차까지 따라 붙습니다. 멀리서 보아 총 몇 대가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삐용삐용 거리니 더욱 사람들이 모여들더군요. 이렇게 큰 차가 줄줄이 오니 괜히 작은 불로 호들갑 떨고 신고한건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소방관 1명만 내려서 대충 현장을 보시더니 불이 거의 다 꺼진 걸 보고 손짓으로 다른 소방차를 얼른 복귀시킵니다. 신호를 본 다른 소방차와 응급차는 쌩 하고 지나가더군요. '아이고 일 났네' 하면서 현장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잠시 뒤 전화가 옵니다.
"아 안녕하세요~ 방금 신고해주셔서 출동한 소방관인데요~ 선생님 (아님)께서 화재 초기 진화 잘 해주셔서 현장 다 수습 완료했습니다~ 소화기는 저희가 잘 처리해드릴테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세요~"
"아 넵.."
집에 오고 안 사실인데 온 몸에 검댕이 묻어 있습니다. 흰 옷에 흰 신발이라 거울을 보니 더욱 티가 나더군요. 게다가 소화기 분말이 얼마나 미세한지 운동화 천 사이를 뚫고 운동화 속에도 가루가 들어왔더군요. 양말을 털어보니 분진이 일어납니다. 덕분에 뿌듯하면서도 귀찮은 하루였네요.


다음 날 퇴근 후 화재 현장을 가보니 정신없이 뿌렸던 소화기 분말이 잔뜩 뿌려져 있습니다. 소화기는 저대로 핀이 뽑힌 채 방치됐길래 '뭐야 그대로네' 했었는데, 3일 쯤 뒤에 지나가면서 슬쩍 새걸로 바뀌어져 있더라구요. 보이는 소화기함 덕분에 큰 덕을 본 것 같습니다. 누가 생각한건진 모르지만 좋은 정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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